고려를 볼 때 먼저 잡을 틀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이어진 왕조로, 수도는 지금의 개성인 개경이었습니다. 47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보통 건국 뒤 제도가 자리 잡은 시기, 1170년 무신정변 이후 무신이 권력을 잡은 시기,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뒤 원의 간섭을 받은 시기로 나누어 봅니다. 이 글은 사건의 순서보다 고려가 어떤 제도로 움직였고 어떤 문화를 남겼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한국사 전체의 흐름은 별도 글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고려 안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봅니다.
중앙 제도: 당의 틀에 고려의 방식을 더하다
고려의 중앙 관제는 흔히 2성 6부로 요약합니다. 중국 당의 3성 6부를 바탕으로 했지만 그대로 옮기지 않고 고려 실정에 맞게 바꾼 것이 특징입니다. 중서문하성이 정책을 논의해 결정하고, 상서성이 그 아래 6부를 거느리며 집행했습니다. 특히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리가 함께 모여 국방과 법제를 의논한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중국에 없던 고려만의 회의 기구로 자주 소개됩니다. 귀족 관료들이 합의로 나랏일을 정하던 고려 정치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 중서문하성: 정책 심의와 결정
- 상서성: 6부를 거느리고 집행
- 중추원: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
- 어사대: 관리의 비리 감찰
- 삼사: 나라 재정의 출납과 회계
관리를 뽑는 두 가지 길
광종 때인 958년, 후주에서 건너온 쌍기의 건의로 과거가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문장 능력을 보는 제술과와 유교 경전 이해를 보는 명경과가 중심이었고, 기술관을 뽑는 잡과도 있었습니다. 무관을 뽑는 무과는 고려 시대에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조선과 다릅니다. 한편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은 시험 없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이를 음서라고 합니다. 시험과 가문이라는 두 길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고려 지배층에서는 대대로 높은 관직을 이어 간 문벌 가문이 큰 힘을 가졌습니다.
지방 제도와 토지
지방은 일반 행정 구역인 5도, 북쪽 국경 지대의 군사 구역인 양계, 수도 주변의 경기로 나뉘었습니다. 성종 때 12목을 두어 처음으로 지방관을 보냈지만, 모든 고을에 수령이 내려간 것은 아니어서 지방관이 없는 속현이 많았고 그곳의 실무는 향리가 맡았습니다. 일반 군현과 별도로 향·부곡·소라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습니다. 토지는 관리에게 등급에 따라 땅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나눠 주는 전시과 제도로 운영했습니다. 땅 자체를 준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조세를 받을 권리를 준 것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불교와 유교가 함께한 사회
고려는 불교를 크게 받든 나라였습니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에도 불교를 중시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고,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가 나라 차원에서 열렸습니다. 승려를 위한 승과가 있었고 국사와 왕사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유교가 밀려난 것은 아닙니다. 성종 때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계기로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국자감을 세워 유학 교육을 맡겼습니다. 개인의 신앙과 내세는 불교가, 정치와 제도는 유교가 맡는 공존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풍수지리와 토착 신앙도 함께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가 남긴 대표 문화
고려의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지금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 많습니다. 아래는 고려 문화를 처음 접할 때 기준점으로 삼기 좋은 것들입니다.
- 고려청자: 맑은 푸른빛으로 이름났고, 12세기 무렵 무늬를 파내고 다른 흙을 메우는 상감 기법이 발달했다
- 팔만대장경: 몽골 침입기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 직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찍은 책으로, 현재 남은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다
- 삼국사기: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했으며, 현재 남은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다
- 삼국유사: 승려 일연이 지은 책으로, 단군 이야기와 향가 등을 담았다
- 목조 건축: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같은 고려 건물이 남아 있다
바다로 열린 나라와 사회 모습
개경 가까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 송의 상인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고려라는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고, 이것이 오늘날 영어 국호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명이 널리 쓰입니다. 사회는 크게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나뉘었습니다. 가족 생활에서는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나누어 상속하고, 호적에 자녀를 태어난 순서대로 적는 등 조선 후기와는 다른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한국사라도 시대마다 가족과 관습이 달랐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고려를 공부할 때 흔한 착각
고려는 조선보다 남은 기록이 적어 단편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기 쉽습니다. 아래 생각들은 한쪽만 본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 고려는 불교만의 나라였다: 정치 이념은 유교였다
- 과거가 생기자 실력만으로 관리가 되었다: 음서와 가문의 힘이 컸다
- 고려 내내 제도가 같았다: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에 크게 달라졌다
- 고려의 지방은 모두 수령이 다스렸다: 수령이 없는 속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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